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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계 미국인 우주비행사 조니 김 [NASA 제공]
“조니 김에 대한 영화가 나왔다
릴게임모바일 면, (영화 속 이야기라 해도) 당신은 절대 믿지 않았을 것이다.”
-재향군인 팟캐스트 ‘제로 블로그 서티’ 진행자
[헤럴드경제=김빛나 기자] 네이비실(미군 해군 소속 특수부대)→하버드 의대 출신 의사→미 항공우주국(NASA) 우주비행사.
내주식연구소 평생에 하나만 이뤄도 대단하다고 여겨지는 성과들을 한번에 이룬 남자. 한국계 나사 우주비행사인 조니 김은 ‘범접할 수 없는 스펙의 소유자’로 한국보다 미국에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지난 8일(현지시간) 꿈에 그리던 우주 비행에 성공하면서 ‘우주로 간 첫 한국계 우주비행사’가 됐다.
이날 국제우주정거장(ISS)에
올스 무사히 도착해 동료들의 환영을 받은 조니 김은 “대단히 감사하다. 여기 있게 돼 영광이다”라고 짧게 인사했다.
미국 항공우주국(NASA) 소속 한국계 우주비행사 조니 김(가운데)이 한국 시간으로 8일 오후 8시 28분경 해치를 열고 국제우주정거장(ISS)으로 진입해 임무를
황금성오락실게임 수행 중인 우주인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NASA 유튜브 캡처]
조니 김과 러시아 우주비행사들은 ISS에서 약 8개월(245일)간 머물며 과학 조사와 기술 시연 임무를 수행한 뒤 12월 9일 지구로 돌아올 예정이다.
평생 꽃길만 걸었을 것 같은 성공 스토리지만 그의 어린 시절
나우콤 주식 은 반전 그 자체였다. 미국의 재향군인 팟캐스트 ‘제로 블로그 서티’ 진행자는 그의 인생이 “영화같다”면서도 “영화로 나왔다면 당신은 절대 믿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에게 어떤 사연이 있었던 걸까. ‘인간승리’라 불릴 정도로 눈부신 일들을 해낸 원동력은 무엇일까.
엄마 지키려 해군 꿈꾸던 ‘가정폭력 생존자’
조니김(가운데)과 그의 동생(왼쪽), 어머니(오른쪽) [나사 익스플로어 캡처]
2002년 2월 11일.
어머니와 함께 집에 있는데 아버지가 귀가했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원래 일해야 할 시간이기 때문이었다. 아버지한테서는 위스키 냄새가 났다. 그는 술에 매우 취해있었다. 평소와 다른 상황에 나는 긴장했다. 아버지는 나에게 다가와 이렇게 말했다.
“미안하다, 조너선.(조니)”
그리고 아버지는 내 얼굴에 후추 스프레이를 뿌렸다. 어머니는 소리를 질렀다.
“아버지가 총을 가지고 있어!”
나는 본능적으로 아버지와 싸우거나 그로부터 도망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싸우기로 했다. 아버지와 몸싸움하며 총을 빼앗으려 했지만 십대였던 내가 그와 싸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아버지는 덤벨로 내 머리를 때렸다. 그때 입은 상처는 아직도 내 몸에 남았다. 몸싸움 도중에 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총이 발사됐다. 나는 아버지를 향해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아빠를 사랑해요. 아직 늦지 않았어요!”
아버지는 그 말을 듣고 멈칫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뒷문으로 도망쳤다. 내가 본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리고 경찰이 도착했다. 머지않아 경찰은 다락방에 숨어있는 아버지를 찾았고, 총성이 울렸다.
아버지는 그렇게 죽었다. 나는 그날을 너무나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이런 말이 잔인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그날은 나에게 있어 ‘해방의 날’이었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네이비실이 될 운명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버드 의대를 가거나 나사 우주비행사가 될 운명이었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내가 평생 두려워했던 존재를 마주하고 맞섰던 경험이 내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조니 김은 2020년 이 이야기를 네이비실 출신 퇴역 군인 조코 윌링크가 진행하는 팟캐스트에서 처음으로 고백했다. 네이비실, 의사, 우주비행사라는 화려한 타이틀에 가려졌던, 아니 이를 가능케 했던 유년 시절 가슴 아픈 사연을 세계 사람들과 당당히 공유한 것이다.
1984년 조니 김은 1세대 미국 이민자 부모의 장남으로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조니는 소심한 아이였다. 주류상점에서 일하던 폭력적인 아버지와 열심히 일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자랐고, 결국 16살에 아버지를 잃게 되는 사건을 겪었다.
그는 유년시절 아버지를 원망했지만, 아버지가 사망하고 그를 용서했다고 말했다. 조니는 “아버지는 (인간에 내재한) 악마들을 다룰 정신적 힘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며 “그때는 단순하게 내가 군인이 되면 아버지를 누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회상했다.
아버지가 죽은 후 그는 청소년 시절에 ‘유일하게 하고 싶었던 일’을 하게 된다.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해군에 입대한 것. 당시 아시아인이 해군, 그것도 특수임무를 하는 네이비실 입대는 극히 드물었다. 그가 입대했던 2002년보다 한참 뒤인 2019년에도 미국 군인 130만명 중 아시아인은 6만3000여명에 불과하다.
그는 네이비실 훈련을 마치고 특수전 요원으로 배치됐다. 잠수부·특수정찰·저격수 등 다양한 특수작전 자격을 취득했으며, 이라크전에 파병돼 100여회의 특수작전을 수행하고 은성 훈장을 받았다.
조니는 전쟁 영웅이 됐지만 전장에서의 또 다른 아픈 경험으로 삶을 바꾸기로 결심한다.
죽은 전우 위해…의대 진학한 ‘전쟁 영웅’
네이비실 훈련을 마치고 특수전 요원으로 배치된 조니 김 [레딧]
2006년 8월 2일.
그날이 내게 어떤 의미였는지 말로 표현하기가 참 어렵다. 아버지 때문에 내가 네이비실이 됐다면, 그날의 일과 그 이후에 벌어진 일들은 앞으로 내가 무엇을 하며 살아갈지를 결정했다. 훨씬 더 많은 영향을 준 사건이다.
그날 나보다 훨씬 더 용감하고, 훨씬 더 헌신적이었던 전우를 잃었다. 훌륭한 동료 2명이다.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 마크 앨런 리, 그는 이라크 작전 중 전사한 최초의 네이비실이 됐다. 내 절친이자 우리의 형제였던 라이언 잡, 그는 얼굴에 총을 맞았다.
그를 구하려는 동료들이 응급 처치를 하는 동안, 그는 기적적으로 의식을 되찾았다. 하지만 그 사건으로 그는 완전히 실명했다. 해군에서도 퇴역해야 했다.
전쟁 중 정말 치열한 경험을 했다. 사랑했던 좋은 친구들을 많이 잃었다. 그 친구들에게 한 가지 약속을 했다. ‘내 남은 인생을 바쳐 세상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겠다’
나는 세상에 영향력을 끼치고 싶었다. 그리고 하버드(의대)에 가는 것이 더 크고 넓은 무대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하버드대에 간 건 ‘하버드’라는 명성 때문은 아니었다.
진짜 이유는 교육이었다. 하버드에 간다고 해서 더 나은 의사가 되는 건 아니다. 그건 착각이다. 미국 어디에서 공부하든, 충분히 훌륭한 의사가 될 수 있다. 나에게 필요한 건 긍정적인 변화를 만들 수 있는, 그 영향력이 필요했다.
조니 김의 하버드대 의대 재학 시절 [나사 익스플로어 캡처]
2006년 조니는 이라크 라마디에 배치되는 동안 동료를 잃으면서 의대 진학을 생각하게 됐다. 전쟁터에서 피 흘리는 동료의 출혈을 막고 의사에게 데려갔지만 결국 사망하는 일을 겪으며 무력감에 빠지게 됐기 때문이다.
그는 미 군사매체 밀리터리닷컴 인터뷰에서 전사한 동료들의 몫까지 더 치열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세상에 최대한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군의관을 꿈꾸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의대 생활이 쉽지는 않았다. 그는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의대 시절이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 중 하나”라며 “군대 생활과 다른 민간인으로서의 삶이 달랐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 의대 재학 중 둘째 아이가 생기면서 학업과 가정을 유지하려 더 많은 힘을 쏟아야 했다.
그는 “하버드 의대에는 정말 수재들이 많았는데 나는 정말 ‘보통사람’이었다”며 “가정과 학업을 병행하기 위해 새벽 3시30분에 일어나 공부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미국 항공우주국(NASA) 한국계 우주비행사 조니 김 [NASA 제공]
의사 조니를 움직인 우주비행사의 말
하버드에서 의학 박사학위를 딴 뒤에는 매사추세츠 종합병원의 하버드대 부속 응급의학 레지던트 근무 등을 거쳐 전문의가 됐다. 레지던트 근무 시절 그는 전(前) 우주비행사를 만나게 되면서 나사 우주비행사의 꿈을 꾸게 됐다.
그는 “의사 출신인 스콧 파라진스키 전 우주비행사가 미국 우주 프로그램에 대해 열정적으로 이야기하는 걸 들었다”며 “아, 나도 이런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조니는 우주비행사가 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어떤 자질이 필요한지 찾기 시작했다. 그는 제 수학 전공, 의학 학위 그리고 네이비실 경험이 어쩌면 나사가 찾는 인재에 부합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는 나사가 찾는 인재상인 ‘제한된 시간 안에 불완전한 정보를 바탕으로 팀과 함께 중대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이 전쟁터에서의 경험과 유사했기 때문이다.
우주비행사가 되는 일은 쉽지 않았다. 9일간의 테스트, 면접, 심사를 거쳐 1600대 1이라는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그는 2017년 나사 우주비행사로 선발됐다. 그는 현역 군인(미 해군 소령)이자 의사 경력을 갖고 있어 미국에서도 관심이 집중됐다.
미국에서도 ‘엄친아(엄마 친구 아들)’로 불릴 정도로 유명세를 탔다. 하버드대 법대를 졸업한 판사 출신 미국 상원의원 테드 크루즈마저 조니 김을 보며 동료 상원의원에게 “우린 지금까지 도대체 뭘 했냐”며 “네이비실에 하버드대 의대 졸업이라니, 말도 안 된다. 이제는 그는 우주에서 우릴 죽였다가 살릴 수도 있어요”라며 농담을 했다.
젊은 층이 많이 사용하는 틱톡에서도 그의 이야기를 다룬 각종 콘텐츠가 화제를 모았다. 좋아요 14만개를 넘게 받은 한 영상에는 “우리 부모님이 이 남자를 몰랐으면 한다”, “나의 롤모델”이라는 댓글이 달렸다.
엄친아 비결? “타이틀 말고 마음을 따라야”
미 항공우주국 소속 우주비행사 조니 김이 8일(현지시간) 카자흐스탄 바이코누르 우주기지에서 우주선에 탑승하고 있다. [바이코누르 EPA]
아이들이 나한테 “아빠(Abba), 나 예술가가 되고 싶어’라고 말하면 나는 정말 기쁘다.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정말 멋지다! 내가 바라는 건 단 하나야. 네가 행복하고, 너의 마음을 따르는 거야.”
나는 동료들과의 약속을 위해 의대를 갔다. ‘(하버드 의대 입학이) 하나의 성과니까 하고 싶다’ 이런 단순한 이유는 아니다. 그런 얄팍한 동기는 아니었다.
나는 내 아이들이 나를 기쁘게 하기 위해 꼭 네이비실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의사가 되거나, 우주비행사가 되어야 한다고 느끼지 않았으면 한다. 그건 너무 말도 안 되는 기대다.
난 그저 아이들이 자기 인생을 스스로 살아가길 바랄 뿐이다. 그래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걸 꼭 상기시키려 한다.
조니 김은 한 번도 타이틀을 위해 행동한 적이 없다고 말한다. 그는 “나는 타이틀을 따기 위해, 누군가의 인정을 받기 위해 직업을 선택하지 않았다”며 “자신의 마음을 따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꿈을 꾸고, 영감을 얻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저는 항상 올바른 일을 하려고 노력했으며, 그런 가치관이 인생의 길을 열어줬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조니 김은 최근 나사가 주최한 인터뷰에서 “나는 우리가 우주정거장에서 하게 될 과학 연구를 공유함으로써 다음 세대에 영감을 주는 데 이바지할 수 있다는 것을 굳게 믿고 지지한다”고 강조했다.